하동군판소리체험관
판소리 명창의 고장 악양
제3기 경남문화기자단 최인호
걸뱅이가 정월에 악양골을 들어서면 이듬해 정월이 되어서야 나온다는 말이 있다. 구재봉, 칠성봉과 깃대봉 회남재, 시루봉, 형제봉, 신선봉 들로 둘러싸인, 골골실실 들어앉은 따뜻한 마을에 인심도 좋고 먹을거리가 많다는 얘기겠다.
겨울이 언제였느냐는 듯 봄바람에 실물결이 넘실거리는 섬진강을 따라가다 악양동로로 들어서니 머잖아 면소재지가 나온다. 매화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을 훔쳐보기를 몇차례, 어느덧 골짝 끝자락 짬에 이른다. 붉은 깃발을 꽂은 산불 감시차를 만나 유성준·이선유 기념관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 판소리 체험관요?’ 하고 되묻는다. 오던 길로 다시 내려가니 등촌로 다리 아래쪽 솔숲 사이로 덩그런 기왓집이 몇 채 보인다. 하중대마을 끝자락 막다른 길에 ‘하동 판소리 체험관’이란 팻말이 나온다.
하동군판소리체험관 입구 전경
체험관은 사단법인 ‘명창 유성준·이선유 동편제·선양회’(대표 이연호)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달리는 ‘명창 유성준·이선유 동편제 기념관’으로 부르기도 한다. 상임이사 서대훈님과 직원 김새아씨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아랫마당 한편에 사무실과 화장실 건물이, 큰 공연이 있을 때 씀직한 크다란 다락 밑을 지나면 가운뎃마당 양쪽에 교육관과 한옥체험관이, 윗마당에 전시관이 자라잡고 있다. 이런 배치는 큰 절집이나 서원, 재실과 비슷한 짜임새다. 다락에 현판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터전이 칠성봉 자락이어서 ‘칠성루’가 걸맞을 터인데, 아직은 그냥 두고 있다고 말했다. 칠성봉은 봉우리 위에 북두칠성이 뜬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하동은 판소리와는 거리가 먼 고장으로 여겨졌다.
학계에서는 2000년대 초 김용근(남원), 박인선(구례), 최란경(서울) 등 명창 유성준의 산소를 조사한 이들이 적잖았다. 하지만 하동에서는, 악양에 유성준의 무덤이 있다는 것도 몇몇 연로한 주민만 아는 정도였고, 더욱이 이선유 명창의 행적과 악양과의 관계는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08년 11월 판소리 연구가 최란경이 <이선유 오가전집 연구>와 <이선유 오가전집 역주>(박이정)를 내고서야 하동에서 명창 이선유와 유성준의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지역의 국악 애호가 구태수, 언론인 장성춘, 향토사 연구가 정재상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유성준의 산소를 정비하고, 이선유의 발자취를 더듬는 등 노력 끝에 ‘명창 유성준·이선유 동편제 선양회’(2010.3)를 꾸린다. 당시 ‘문학수도 하동’을 선포하면서 박경리의 <토지>와 함께 ‘판소리’를 내세울 만하다고 보고, 유성준·이선유를 기념할 건물을 순차로 지어 2015년에 준공하고, 2016년 10월, ‘하동 판소리 체험관’으로 이름붙여 개관하기에 이른다. 현재 체험관은 ‘명창 유성준·이선유 동편제 선양회’에서 위탁관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선유, 유성준 명창의 하동쪽 행적을 밝혀낸 최란경은 정작 체험관 설립과정에서 조명되지 못하고 있었던바, 나중에야 이선유 등의 동편제 판소리와 하동이 판소리의 고장임을 널리 알린 공적을 들어 하동 명예군민(2012)으로, 이어서 체험관 설립과 운영에 이바지한 공로로 감사패(2018)까지 받게 된다. 그는 현재 사단법인 ‘동편제 이선유 판소리보존회’ 이사장이자 경상남도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성준 일대기를 소개 한 기념관
이선유와 유성준은 1873년에 나서 1949년 같은해에 타계한다. 이선유는 악양에서 태어나 15세 때 구례로 가서 송우룡(송만갑 부친)에게 배우며, 유성준 역시 소년시절에 같은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운다. 유성준도 악양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고, 만년에 하동읍을 거쳐 악양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두루 ‘세습 예인’ 출신으로서 근대오명창에 들었으며, 송만갑협률사원으로 전국을 돌며 창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진주권번에서 소리사범으로 있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1930년대에는 방송에 출연하거나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판소리 음반을 취입하기도 한다. 이제 탄생 140여년 만에 다시 한자리에서 놀게 됐으니, 당자도 후예들도 복된 일 아닌가.
신재효가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였다면, 이선유는 만년에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 수궁가, 박타령을 읊고 김택수로 하여금 받아적게 하여 엮은 <오가전집>(1933, 대동인쇄소)을 남긴다. 이는 판소리 명창의 소리를 활자화한 최초의 기록이다.
신재효가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였다면, 이선유는 만년에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 수궁가, 박타령을 읊고 이를 김택수가 받아적어 엮은 <오가전집>(1933, 대동인쇄소, 사진)을 남긴다. 이는 판소리 명창의 소리를 활자화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선유의 양아들이자 조카인 진주 출신 이재호(본명 이삼동)는 판소리 대신 작곡가로 나아가 ‘번지 없는 주막’ ‘귀국선’, ‘물레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숱한 곡을 남겼다.
한편, 유성준 명창의 수궁가는 제자 정광수(1908~2003)에게 전해져 1986년 <전통문화오가사전집> (1986, 문원사)에 기록된다. 현재 수궁가는 정광수 명창의 제자 정옥향(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준보유자) 명창이 맥을 잇고 있다.
하동 판소리 체험관 관장으로 있는 정옥향님을 만나 몇 말씀 들어본다.
- 정광수 명창의 제자로 알고 있다. 언제부터 배우셨나?
- 처음엔 김소희 선생께 춘향가와 민요를 10년 안팎 배웠다. 박봉술 선생께 적벽가를 배우다가 1968년부터 정광수 선생 문하에 국비장학생으로 들어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를 배웠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스승으로 모셨다.(정광수 명창은 춘향가, 수궁가 무형문화재)
- 오래도록 정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분의 스승인 유성준 명창 얘기도 많이 들으셨겠다.
- 예전 소리꾼은 스승을 찾아 배우는 데 먼길을 마다지 않았다. 정광수 선생은 나주 출신인데, 유성준 선생이 진주권번에서 사범으로 계실 때 진주로 찾아가 일년 남짓 날마다 점심으로 설렁탕을 올리며 수궁가를 배웠다고 했다. 선생은 설렁탕을 무척 맛있게 자셨다고 한다. 늘 그리워하며 선생의 사진이 없어 초상화라도 그려 모시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얼마 전에 60대 때 찍었던 사진이 발견되어 인터넷에도 오르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나마 큰 다행이다.
- 하동과의 인연은? 여기 늘 머무시는 건 아니라고 들었다. 어떻게 관장으로 오시게 되었나?
- 이곳에 유성준 선생 산소가 있다. 산소를 단장할 때 하동의 ‘명창 유성준 이선유 동편제 선양회’에서 불러서 왔던 게 인연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서울과 안동에 연구소(정옥향 판소리 연구소)를 두고 오르내리기도 한다.
- 앞으로 체험관에서 계획하는 바가 있다면?
- 하동과 악양에 빚이 많다. 여건만 된다면 ‘하동 아리랑’ ‘악양 강강술래’ 같은 걸 만들어 불리게 했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하다.(그러면서 ‘괘나리 붓짐을 짊어지고 형제봉 구재봉을 넘어간다’. ‘놀아라 놀아라 놀아라 얼씨구 절씨구 놀아라, 강~강~술~래’를 읊조렸다.)
- 그동안 거쳐간 제자들도 많겠다. 여기서도 판소리를 가르치시는 걸로 안다.
- 사오십명 되지만 제대로 된 제자를 두는 일은 쉽지 않다. 여기서는 판소리, 민요반에 학생 일곱, 일반인 스물다섯 분 남짓이 배우러 온다.
교육관에서 정옥향 관장의 지도로 판소리와 민요를 배우고 있는 수강생
현재 하동판소리 체험관에서는 전시관을 두어 유성준·이선유 명창과 관련된 자료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일제 때 취입한 음반 복사본을 듣는 시설을 갖추었으나 내용이 덜 채워진 점이 아쉬웠다. 고제 동편제 판소리가 담긴 음반이나 복사본을 좀 더 모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또한 서편제, 중고제 명창들의 소리도 두루 갖추어 판소리 갈래를 견줘볼 수 있으면 더할나위가 없겠다. 이웃 구례나 남원, 전주, 나주, 광주에 판소리 관련기관이 적잖은데, 자료 교환이나 대여 사업을 벌여보는 것도 한 방편이 아닐까 싶다.더불어 하동군에서 생가 복원도 추진하고 있다니, 기대가 된다.
체험관에서 현재 벌이고 있는 교육사업으로, 판소리·민요반(강사 정옥향), 고법반(강사 이종세), 농악반(강사 이연호), 대금반(강사 구주영), 시조창반(강사 하수임)을 두어 운영하고 있다. 시골에 치우쳐 교육사업에 한계가 있겠으나, 전문 기획자나 학예사를 두어 교육과 행사, 관광을 연계하여 체험관을 꾸려나간다면 얼마든지 발전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또한 한옥체험관엔 4인실 둘, 8인실 하나를 두어 실비로 묵으면서 판소리 내림과 함께 명창의 고장 악양의 아늑한 풍광을 즐길 수 있게 해 놓았다.
(연락처: 하동판소리체험관 055-882-2342)
※본 기사는 7월 31일 수정 게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