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
백로의 날갯질으로 창동의 봄을 열다
제4기 경남문화기자단 정문순
마산 창동의 봄을 백로의 날갯짓이 열었다. 지난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창동예술촌 창동갤러리에서 초대전으로 사진작가 하해룡의 백로 사진전이 열렸다. ‘백로 사진의 대가’로 알려진 하 작가는 1944년 생으로 서른 살에 카메라를 매기 시작한 이후 45년 간 작품 활동에 매진해 온 사진계의 원로이다. 전시를 통해 대중과 만난 것은 1985년부터이며 이번은 그의 8번째 사진전이다. 그동안 하 작가의 카메라에 단골로 담겼던 피사체들은 백로, 재두루미, 물총새, 동박새, 후투티, 갈매기 등의 조류와, 산과 들에 절로 피어나는 들꽃이다. 그 중에서도 역시 그가 작품 활동에서 가장 집중한 것은 단연 백로다. 하 작가가 백로 사진전을 연 것은 1987년과 2016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총 여덟 번의 작품 전시회 중 백로 사진전만 세 번이나 했으니 하 작가에게 백로는 사진에 담기는 피사체를 넘어 각별하고 귀한 존재다.
하해룡 사진전이 열린 창동갤러리 입구
이번 전시는 하 작가가 오랜 세월 동안 무수히 찍은 백로 사진 중 직접 고르고 고른 알짬들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갤러리를 찾은 사람이라면 눈부시고 환상적인 백로의 자태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기자는 처음에는 합성사진이거나 포토샵 처리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순백의 흰빛으로만 알고 있었던 백로 날개는 사진 속에서 막 떠오른 해의 잔영을 받아 보랏빛이나 하늘빛으로 다채롭게 변주되었다. 생명은 카메라 속에서 새로운 빛깔과 모습으로 비상하고 꿈틀거렸다. 부채꼴 같은 날개 펼침, 중력을 느낄 수 없는 사뿐한 몸짓, 미세한 터럭을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것 같은 백로들은 군무를 추는 발레리나로 되살아났다. 또 전시회에서 유일한 흑백사진 속의 백로 날갯짓은 수묵담채화의 붓놀림을 보는 듯도 했다. 이런 사진들을 어떻게 찍었을까. 갤러리에서 만난 하 작가는 인위적인 손질은 최소화했다고 말했다.
작품을 설명하는 하해룡 작가
“새와 해를 함께 찍기 위해 연속촬영 또는 다중촬영을 하거나, 두 번 나누어 찍은 것을 잇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연출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알게 되지요. 사진은 최대한 자신이 스스로 찍어야 합니다.” 환상적인 백로 사진에서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자에게 하 작가는 ‘결백’과 자신의 소신을 강조했다. 물론 다른 사진가들의 경우 포토샵 처리를 하거나 간혹 작품을 만드는 데 ‘홀려서’ 꽃을 찍기 위해 아예 꺾거나 멀리 있는 나뭇가지를 가까이에서 찍으려고 놋줄을 걸어 당기는 등 지탄받을 행동을 하는 사진가들도 없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요즘은 드물다고 하 작가는 말했다.
드물게 흑백으로 촬영한 백로사진.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하다.
하 작가는 결혼한 다음 해에 딸을 낳았고 그때부터 줄곧 사진을 찍었다. 올해 딸이 45살이니, 하 작가에게 딸의 나이는 곧 자신의 경력과도 일치한다. 젊은 시절 기타나 전자오르간 연주로 생계 활동을 했던 하 작가가 사진에 입문한 건 벌여놓은 사업이 스러지면서 상실감을 달래려고 한 것이 계기였다. 사진이 좋아서, 새가 좋아서, 산으로 물로 새를 만나러 다니고, 꽃을 찾아 다녔다. 특히 백로의 군락지인 창원 주남저수지, 통영 학섬, 의령을 즐겨 찾았다. 봄에는 미얀마나 베트남에서 날아 온 백로를 맞으러 갔고, 가을에는 떼 지어 떠나는 백로와 이별하러 다녔다. 새벽부터 해 뜰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리며, 백로가 등장하거나 한 쌍의 백로가 사랑을 나누거나 어미 백로가 둥지 속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려고 다가가는 순간을 수십 컷의 촬영으로 포착했다.
간혹 수놈이 먼저 죽을 경우 혼자 남은 암놈이 먹이를 구하러 3시간 남짓 둥지를 비우면 동행한 동료 작가들과 함께 새끼들이 옹기종기 깃든 둥지를 돌보아 주기도 했다. 어미가 돌아올 때까지 천적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지키거나, 둥지가 바람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뭇가지로 받쳐줌으로써 새끼들의 성장을 도운 것은 사진 활동에서 느낀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하 작가는 강조했다. 물론 사진을 찍는 일보다 백로를 ‘양육’한 일에서 더 큰 가치를 느끼는 작가의 마음을 백로들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가을의 우포늪에서 백로들이 따뜻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무거운 필름카메라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르내렸지만 2010년 경부터는 디지털카메라를 쓰고 있다. 2년 전에 구입한 니콘 D5가 지금 그의 예술 동반자이다. 덕분에 암실에서 현상 작업을 할 때 ‘어마어마한’ 약물 냄새를 견뎌야 하는 일도 이제는 옛날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옛말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하 작가처럼 상업사진을 찍지 않는 작가에게 사진은 돈 되는 일이 아니다. 줄곧 사진으로만 한 우물을 판 하 작가에게 부인을 포함한 가족들은 대가인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여전히 풀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하 작가는 끼리끼리 봐주고 띄워주는 것 같은 미술계의 고질적인 풍토가 마뜩치 않아 사진가협회 회원인 적도 없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이나 경상남도 미술대전과도 거리를 두었다고 하니, 외골수 작가에게 돈이나 이익은 더욱 붙지 않았다. “숨 그치는 날까지” 사진을 찍고 싶을 뿐 아무런 후회도,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는 하 작가이지만 비용 부담이 커서 작품을 자주 전시할 수 없는 현실은 안타깝다.
평화로운 정경으로 보이지만 백로 둘이 싸우고 있다. 하해룡의 작품은 백로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사랑 없이는 나오기 힘들었다.
하해룡 백로사진전은 2019년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올해 9개 분야에 450건이 선정되었고 14억3천8백만 원의 시·도비가 지원되었다.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이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길이 더 늘어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