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트렌드 누군가의 안녕을 염원하며 “무수히 안녕” 2023 경남도립미술관 마지막 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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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57 / 23-12-14 글 / 사진 정재흔 작가본문
“안녕하십니까?” 으레 주고받는 인사말에 당신의 하루가 순탄하기를 빌고, 당신의 삶에 평안과 행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한 해가 저무는 동안 당신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안녕을 빌어 왔던가. 그런 다정한 당신도 ‘무수히 안녕’하길 바라는 경남이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안녕(安寧)’을 바라는 염원(念願)에 착안해 경남도립미술관이 기획한 올해 마지막 전시 ‘무수히 안녕’이다.
경남도립미술관 기획전시 ‘무수히 안녕’
인간의 진실한 비언어적 언어 ‘염원’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등 거대한 자연과 영적 존재와의 교감은 우리네 신앙의 기원이다. 이 염원들은 구도(求道)적 의미의 종교와는 분명 다르다. 소박한 믿음은 민중들, 보통 사람들이 삶 속 역경을 견뎌내고 고단한 생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작은 원동력이 된다.
서구 문명의 도래 이후 우리의 신앙을 미신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우리 몸 안에 내재된 염원의 행위는 일출 명소를 찾아 가족의 평안을 바라거나 새로운 일을 앞두고 고사를 지내는 등 생활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 가족과 나의 안녕을 비는 행위는 그 진위 여부,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가장 진실한 인간의 몸짓인 것이다.
경남도립미술관은 기획전 ‘무수히 안녕’을 통해 이성과 비이성,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야만 같은 이분법적 경계들로 인해 경시되고 억압되고 있는 소박한 믿음의 세계관을 회화, 영상, 설치, 사진 등 미술과 경남의 전통 공예로 재해석했다.
전시는 염원을 둘러싼 한국의 역사·사회·문화적 양상을 새롭게 주목하고 애도와 놀이, 점복과 치유, 의례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동의 상상적 자원’으로 삼아 잠재한 ‘얽힘’의 감각을 탐구한다.
동시대 미술작가 6명과 경남지역 장인 2명 등 8명 참여
이번 전시에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온 동시대 미술작가 6명과 경남지역 장인 2명 등 8명이 참여했다. 김상돈, 서윤희, 신지선, 조현택, 제인 진 카이젠, 홍이현숙 등 작가 6인의 회화·영상·설치·사진 작품과 함께 조대용·최웅택 등 경남 장인의 대발·도예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참여 작가들은 ‘맞이’, ‘회복’, ‘연결’ 3개의 주제에 따라 주변부의 무수한 염원을 전시 공간으로 소환한다.
안녕을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문
제1관 ‘맞이’는 안녕을 구하는 모든 존재를 맞이하는 공간이다. 신지선의 영상, 조현택의 사진, 김상돈의 설치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상품화된 토템, 마을축제인 전통제례, 동학 농민군 등을 다루며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성과 속,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조현택 ‘스톤마켓’
가장 처음 보이는 조현택의 스톤마켓 시리즈는 빠르게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파편화된 이면을 조명한다. 전국의 석재상을 야간 촬영한 사진 연작으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문명 이전의 믿음의 대상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서 시작됐다.
숭배의 대상이었던 석상이 낡고 오래되고 때로는 눅눅해 보이기까지 하는 배경에 줄지어 선 모습은 꽤나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불상, 성모상, 동물석상 등 맥락 없는 석상의 나열은 기묘한 공포심, 이질감을 자아낸다.
신지선 ‘눈의 소리’
신지선의 ‘눈의 소리’는 영으로 미래를 보는 미아리 점성촌의 시각장애 역학인과 화성을 탐사하는 로봇의 눈을 교차하고 중첩시킨 영상 작품이다.
완전히 상반돼 보이는 이성과 비이성의 상징인 이들은 불확실한 세계를 탐구하는 인간의 근원적 호기심이란 공통점이 있다.
김상돈 ‘( )시의 시민’
김상돈은 배척당한 사람들과 사물의 이면에 감춰진 기억을 한국 토속신앙 요소를 활용해 재창조했다. ‘( )시의 시민’ 연작은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한국적 맥락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로댕의 작품은 14세기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 군대에게 포위당한 프랑스의 칼레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6명의 시민 대표가 목숨을 바쳤다는 ‘칼레의 시민’ 일화를 소재로 삼은 기념상이다.
김상돈은 칼레의 부르주아들과 달리 만민의 평등함을 주창했던 동학농민운동의 교주들을 효수시킨 역사를 되짚었다. 선혈이 흐르는 듯 붉게 칠한 대나무 장대에 더덕더덕 붙은 알은 타자의 생명과 존엄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생명정신이자 음식과 같은 속된 형상, 원, 알, 별의 성스러운 원초적 형상을 모두 지닌다.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현 시대의 시민정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초월의 시공으로 향하는 오감을 회복시키는 공간
제2관 ‘회복’은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작품들 사이를 유영하며 우리의 몸과 기억에 내재된 믿음의 정신과 감각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유한한 운명과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존재에 닿고자 하는 우리의 오감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 점차 무뎌져 왔다. 거대한 자연과 접촉하고 또 이를 통해 영적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장이다.
서윤희 ‘기억의 간격-반야용선’
서윤희 작가에게 자연은 인간을 치유하는 본질이다. 기억과 어울리는 색을 선택하고 색과 질감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자연 재료와 그 장소를 선택한다. 이를 한 겹 한 겹 작가의 자신의 신체를 활용해 덧입히고 중첩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 얼룩마다 여러 시간대의 기억들, 자연의 시공간, 안녕을 향한 염원이 담긴다.
‘기억의 간격-반야용선’에서 보이는 얼룩과 기억 속 인물과 관계되는 가상의 인물들이 줄지어 극락정토로 향해 간다. 그리하여 도달한 ‘기억의 간격-홍연’은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영적 공간 그 자체다.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홍이현숙은 여성, 신체, 환경 등에 대한 작업을 선보여 왔다.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은 북한산 승가사의 거대한 마애불을 카메라를 통해 만지는 영상 작품이다. 모든 존재를 마주하고 이들과 삶의 속도를 맞추어 같이 살아가고자 그는 시각, 촉각, 후각, 미각, 공감각 등 모든 감각을 활용한다.
천천히 마애불의 생김새를 훑으며 자신의 목소리로 불상의 생김새와 촉감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도 관람객으로부터 닿을 수 없는 마애불과의 접촉을 감각하게 한다.
과거와 현재,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
제3관 ‘연결’은 누군가의 안녕을 구하는 갸륵하고 진실한 마음을 과거와 현재,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공간이다. 두 장인은 작품을 매개로 오랜 염원의 시공을 오늘에 포개어 바라본다.
최웅택 ‘진해 웅천 찻사발’
경남 진해의 최웅택 사기장은 웅천 가마터에서 수집한 도편을 통해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고 한국과 일본의 문헌을 찾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웅천 찻사발을 재현해 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웅천 도공들을 끌고가 웅천 찻사발의 명맥이 모두 끊겼었다.
최웅택 사기장은 40년간의 연구를 통해 모든 재료를 직접 채취하고 조선시대 도공처럼 물레질하며 손수 지은 가마터에서 도자기를 구워 내고 있다. 망국의 혼을 기리기 위해 매년 11월 ‘웅천 선조 도공 추모제’를 지내며 선조를 향한 존경과 애도를 표현하고 있다.
조대웅 ‘발’
염장(簾匠)은 발을 만드는 장인을 뜻한다. 조대용 염장은 통영에서 태어나 증조부 때부터 4대째 대발을 제작하고 있다. 발은 가리개일 뿐만 아니라 사당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역을 구분하는 도구이자 혼례에서도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등 소통의 수단이었다.
우리의 삶과 문화가 담겨 있는 대발은 대나무를 쪼개 얇은 올을 뽑고 엮기까지 100일간의 정성을 들여 만들어진다. 선풍기, 블라인드 등 주거형태의 변화로 인해 전통 발의 수요가 격감하는 현실 속에서 조대용 염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발을 제작하고 예술인들과 프로젝트를 시도하며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제인 진 카이젠은 한국전쟁과 자신의 서사를 바리공주 설화를 통해 교차시킨다. 1980년 제주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그는 역사, 기억, 이주, 번역 등에 관심이 많다. ‘이별의 공동체’는 전쟁과 분열로 고통받은 공동체를 다층적 시각으로 보여주기 위해 3채널 영상 설치 작품을 완성해냈다. 바리공주는 지어진 경계를 거부하고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게 된 무조신이다.
작가는 바리공주 신화를 ‘동시대 여성 디아스포라’로 해석하며 첫 번째 영상에서 작가 본인의 모습을, 두 번째 영상에서는 제주의 검은 용암과 제주 바다, 세 번째 영상에서는 제주 4·3사건의 생존자인 무당 고순안이 굿을 준비하는 장면을 담아낸다.
비선형적 내러티브는 위계가 없어 혼란스러운 대신에 신화 속 바리공주처럼 질서를 거부하고 잊혀 가는 집단적 믿음의 기억과 정신을 되살리고 단절을 넘어 위로의 공동체를 제안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며 열린 ‘무수히 안녕’이 서로에게 기꺼이 ‘안녕’이란 인사를 보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