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공감 [경남 클라쓰] 경남의 DNA에는 남명 조식의 정신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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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0 / 24-06-24 글 김봉임 / 사진 남명학연구원 제공본문
경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남명 조식. 우리 시대 남명학이란 무엇인가?
남명 조식(1501~1572)이 살았던 조선시대와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시공간적인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명 조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크다.
지역, 계층, 세대, 성별 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지금, 사회적 통합을 위해 남명의 선비 정신을 현재적 의미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남에서 태어나
경남에서 가르치다
남명 조식의 고향은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이다.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연산군 7년에 태어났다. 자는 건중인데 태어날 때 우물에서 무지갯빛이방에 뻗치어 가득 찼다고 한다. 25세에 성리학을 처음 읽고 원나라 선비 노재 허형의 말인 ‘모든 일은 낱낱이 살피어 물질을 쫓아갈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감동받고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다.
26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어 고향인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살다가 30세에 처가가 있는 김해군 탄동(대동면)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사하면서 산해정을 지어 제자를 가르쳤다. 38세에 나라에서 헌릉참봉1)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도학 공부에만 열중하였으며, 48세에는 전생서2)의 주부3)를 제수받았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사화 이후 흩어진 선비들을 모아 학문에 힘썼다. 61세에는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와서 별세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으며, 1572년에 병이 심하여 72세를 한평생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요한 물 ‘이황’
타오르는 불 ‘조식’
16세기 당시 이황과 조식은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이황의 근거지 안동과 예안4)은 경상좌도의 중심지였고, 조식의 근거지 합천과 김해,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으로 나뉜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이황과 조식, 두 사람은 여러모로 달랐다. 이황이 학문 자체를 좋아하여 깊이 파고드는 유형이라면, 조식은 핵심을 체득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유형이다. 이황이 자신의 생각을 친절하게 상세히 설명하는 편이라면, 조식은 간결하게 비유나 풍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이황은 현실 정치에 몸담으면서도 시사 문제는 애써 피하려고 했고, 조식은 현실 정치를 거부하면서 세상사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분개하고 비판했다.
퇴계가 고요히 흐르는 물이라면, 남명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었다. 이황과 조식이 서한으로 논쟁을 벌인 대목만 보더라도 두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이황이 조식에게 “그대는 오만하여 중용(中庸)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老莊)에 물든 병통이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 선생이 이런 젊은 선비들을 야단치고 제대로 이끌어 주지 않으니 더 심해진다고 응수했다.
서슬 푸른 선비
을묘사직소
조선 명종 11년(1555)에 남명 조식은 <을묘사직소>를 쓴다. 조정에서 조식에게 '단성현감' 벼슬을 내리자 그는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상소 형식을 빌려 당시 정치를 강력하게 비판하는데, 임금의 책무를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 궁궐에서만 살아와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는 과부라는 직설적 표현이 등장한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런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칭하고, 명종을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라고 했다. 곧 임금은 임금이 아니고 대비는 대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권력을 독점한 권신(權臣)들을 향해서는 '야비한 승냥이 떼'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왕조 시대 임금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는, 조식이 상소문 위에 자신의 목을 잘라 올려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을묘사직소'는 유학자의 정신, 학문하는 자의 역할을 한마디로 보여주었다. 이후 '을묘사직소'는 조선의 뜻있는 유학자들에게 '상소'의 전범(典範)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올바름을 실천하는
남명학은 살아있다
남명의 학문은 실행에 중점을 둔 지행합일을 추구하는 ‘경의학’(敬義學)이다. 다른 학자들도 경을 중시했지만 남명은 죽는 날까지 경과 의를 실천한 대표적인 유학자라 할 수 있다. 경(敬)이란 안에서 바른 마음을 갖는 것이요, 의(義)란 밖으로 사물을 올바르게 처리해 실천하는 것이다. 조식은 알고서 올바르게 실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조식의 실천사상을 배운 후학들은 임진왜란 등 국난을 당했을 때 의병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남명 조식의 ‘경의학’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학문이 아니라 오늘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살아있는 학문이다. 자신만의 입장을 내세우는 주장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조식의 남명학은 우리가 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1) 헌릉참봉(獻陵參奉) : 조선시대 문관(文官) 종구품(從九品) 관직명.
2) 전생서(典牲署) : 조선시대 궁중의 제향(祭享) · 빈례(賓禮) · 사여(賜與)에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관서.
3) 주부(主簿) : 조선시대 관서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6품 관직.
4) 예안 :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옛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