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토크 [이달의 인물] 피아노가 있는 곳이 언제나 제 자리죠 - 이충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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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1 / 24-07-26 글 김달님 / 사진 백동민본문
진해의 한 라이브 카페. 무대에 오른 한 남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곡명은 차이콥스키의 곡 「사계」 중 11월. 한 음 한 음 부드럽게 자신의 연주를 이어가는 주인공은 시각장애 1급 피아니스트 이충언 씨다. 여덟 살에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를 접한 이후 지금까지 늘 피아노와 함께해 왔다는 이충언 씨. 그의 삶에서 피아노는 어떤 의미일까? 또 경남에서 장애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다.
우연처럼 다가와
운명이 된 피아노
이충언 씨는 시각장애 1급이다. 6~7세 때 특별한 계기 없이 망막박리 판정과 함께 시력을 잃었다. 1999년 당시 경남에는 시각장애인 학교가 없어 부산맹학교에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다. 예고 없이 닥친 시각장애처럼 피아노와의 만남도 갑작스레 찾아왔다. 입학 후 첫 여름방학, 어머니가 그 몰래 피아노 학원을 등록해버렸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피아노가 좋았던 건 아니에요. 클래식도 잘 모르는 데다 긴 시간 의자에 앉아있는 게 고역이었죠. 저를 담당한 선생님도 시각장애 학생이 처음이라 어려움이 많으셨어요. 피아노에 진지해진 건 지금까지도 저의 스승으로 계신 김수경 선생님을 만나고부터예요.”
피아노와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피아노를 떠나지 않은 건 그의 의지였다. 시각장애라는 특성을 가지고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기 위해선 악보와 건반을 익히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음악 점자로 악보 읽는 법을 익히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대신 김수경 선생님께서 음을 하나하나 불러주시면 제가 따라 치는 방식으로 연습을 계속했어요. 녹음한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외우기도 하고요. 그렇게 1년에 2~3곡씩 연주곡을 늘려갔죠.”
이충언 씨가 잠시 피아노를 그만둔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이었다. 시각장애인이 가장 선호하는 사회복지학과로 진학을 준비하던 중 재수를 하게 됐다. 그때 스승인 김수경 피아니스트가 다시 한번 그에게 피아노를 권했다. 그렇게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이충언 씨는 깨달았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역시 피아노구나.’ 그리고 그해 대구예술대학교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을 했다. 성취감도 있었지만 진로 고민을 하며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취업을 권유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피아노를 선택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고민은 여전했어요. 제가 설 수 있는 무대나 기회가 거의 없다고 느껴졌죠. 특히 경남은 장애인 예술 활동도, 일자리도 매우 한정적이라 더 막막함을 느꼈어요.”
2021년 이충언 씨는 복지형 일자리로 창원 장애인 오케스트라인 ‘한마음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사회인 중 한 명으로 소속감을 느꼈고, 급여를 받으며 자존감도 높아졌다. 하지만 매년 수요는 증가하고 많은 이들이 기회를 누리기엔 자리가 한정적이었다. 이전에 한국음악협회에서 근무한 일도 있지만 단기간 일자리라 5개월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이 한 명의 사회인으로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면 적당한 급여와 일자리가 필수적이에요. 특히 지역에서 장애 예술인이 겪는 어려움은 더욱 복합적이죠. 기업에서 장애 예술인을 직접 고용하는 사례처럼, 안정적인 일자리와 지속적인 예술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선 지자체와 복지기관, 문화예술기관, 금융기관 또는 기업의 긴밀한 협력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장애 예술인이 바라는
‘나의 자리’
경상남도는 후반기 도정 운영 방향으로 ‘복지’, ‘동행’, ‘희망’을 꼽았다. 이와 함께 경남문화예술진흥원도 청년, 장애 예술인과 ‘동행’하기 위해 관련 정책과 지원 사업을 보완했다. 신규 사업 개발, 지원 내용 확대는 물론 청년, 장애 예술인에게 부여하는 가산점도 높였다. 이충언 씨는 이에 더해 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확대를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운영하는 ‘넓은마을’이라는 사이트가 있어요. 장애인 예술활동 지원사업과 공연 정보를 취합해 알려주는 곳인데요. 경남에서도 관련 소식과 정보를 ‘넓은마을’을 통해서도 알려주신다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와 함께 장애인 지원단체와 협력하여 장애인 개개인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이충언 씨는 최근 여러 콩쿠르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한국피아노재능기부협회 장애인 콩쿠르에서 우수상을, ‘제1회 Harmony 장애인 음악 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 가장 큰 규모인 국제시각장애인음악콩쿠르에선 본선 진출의 기쁨을 누렸다.
“국제시각장애인음악콩쿠르 본선 참가를 위해 서울에 갔어요. 좋은 성적을 얻진 못했지만 큰 규모의 대회를 직접 경험하고 전문가 멘토링을 듣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됐죠. 꼭 필요한 경험이자 훈련이라고 느꼈어요. 언젠가 경남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최한 장애 예술인 지원 관련 포럼에서 경남장애인콩쿠르 개최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 있거든요.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지역의 장애 예술인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충언 씨에겐 꿈이 있다. 50대에 자신만의 음악 기획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클래식 피아노를 포함해 관악, 성악, 실용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자신과 같은 장애 예술인에게 필요한 기회와 무대를 마련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저에게 필요했던 자리를 제가 만드는 거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