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7 발행월 : 2024. 12

close
게시물 검색

이슈&공감 [경남 클라쓰] Oh! 광대 -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경남 오광대’

페이지 정보

vol. 61 / 24-07-26 글 서영무 / 사진 제공

본문


2022년 경남 오광대 5(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가산오광대, 진주오광대, 김해오광대)이 포함된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한국의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이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이 높이 평가됐다. 그중에서도 경남 오광대는 경남 지역에만 있는 탈놀음이다. , , 음악, 연극 요소가 결합되어 독특한 예술적 매력을 발산하고, 풍자와 해학을 통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매우 강한 비판 정신과 공동체에 대한 존중이 강하게 드러난다. 전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이러한 귀중한 경남의 전통 예술 경남 오광대에 대해 더 알아보자.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4738_0632.jpg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4751_32.jpg
 

소박한 아름다움

통영오광대

통영오광대의 기원을 살펴보면 1604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이후 매해 섣달그믐날 통제사 동헌에 들어 밤늦게까지 농악를 치고 탈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생긴 취고수청이 통영오광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통영오광대의 춤사위는 쓸데없는 기교가 들어가 있지 않고 투박하며 저절로 추임새가 나오도록 하여 신명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인위적이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은 바로 한국적 자연주의의 표출이라 볼 수 있다. 통영오광대는 의식으로 시작해서 점차 놀이의 형태로 변하였으며, 가면극 중 풍자성과 비판 의식이 가장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배김새 가락에 맞추어 들어갔다 나왔다 하다가 제자리에서 우뚝 멈추어 서서 장단에 맞추어 고갯짓을 할 때는 건무 형태의 춤보다 더욱 큰 역동성이 드러나고 장단과 춤의 만남은 통영 덧뵈기춤의 극치를 이룬다.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4914_7136.jpg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4920_9564.jpg
 

삶의 고뇌가 담긴

고성오광대

경남 고성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면극이다. 주로 정월 대보름에 연행됐으며, 조선 시대 말부터 1930년대 말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기 전까지 활발히 진행됐다. 일제의 수탈로 서민들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사람들은 더욱 연희를 그리워하게 됐고, 광복 직후 1946년 새롭게 문을 연 가야극장과 시민극장에서 오광대 공연을 열었다. 고성오광대는 과장 간의 개연적 연결고리가 없는 대신 오광대 전체를 아우르는 춤, 반주, 대사, 노래의 개연적 연결이 조화롭고, 삶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다. 민속 연희적 요소보다 공연적 요소가 강하지만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문화적 연결고리의 역할은 변함없다. 고성오광대는 그 내용과 형식 면에서 부단히 변화를 거쳐 왔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탈춤으로서 현존하는 영남형 탈춤 중 가장 원형에 가깝게 전승되고 있으며, 극보다는 춤이 월등히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9687_8027.jpg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9695_2616.jpg
 

저잣거리의 삶이 담긴

가산오광대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서 발원되어 전승되고 있는 영남형 탈춤 가면극이다. 축동면 가산리는 1760(조선조 영조 36) 조창이 설치돼 8개 고을의 세곡을 징수해 이곳에 비축했다가 배로 서해를 통해 서울로 운송하던 항구였다. 그 당시는 300여 호의 대취락지를 이루며 큰 시장이 형성되고 타 지방과도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던 곳으로 번창한 저잣거리에서 탈놀음 문화가 발달하게 됐다. 이때 오광대를 조창오광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산오광대의 특징은 다른 지방에는 없는 무사태평과 부귀공명을 기원하는 오방신장무(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 춤사위가 계승되고 있는 점이며, 영노탈이 사자 모양과 같아 사자무를 겸하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또한 할미·영감 과장에서 이례적으로 영감이 죽는 것도 특이하다.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9841_504.jpg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29853_954.jpg
 

최초로 채록된 가면극

진주오광대

경상남도 진주시에 세시풍속으로서 전승되어 오는 탈놀음이며, 한국 최초로 채록된 가면극이다. 기존의 민중 계층뿐만이 아니고 지식인, 지주 등이 참가하여, 소박한 민중의 놀이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진주시 사람들의 순수한 놀이로 승화된 탈놀음이었다. 또한 1934년 정월에 진주에서 오광대 공연이 있었고, 그것을 당대 최고의 민속학자였던 송석하가 직접 보고, ‘동아일보에 소개했다. 1920년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쇠퇴한 후 결국 중단됐다. 그 후 몇 차례나 재연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다가, 1998년 역사적인 복원 공연에 성공했다. 진주오광대의 음악은 다른 지역 오광대와 비교해서 세분화되어 타령 · 세마치 · 도토리 · 염불 등 변화가 많다. 움직임도 등장 인물의 성격에 따라 진춤 · 문둥춤 · 중춤 등 다양한 춤을 추며, 특히 교방춤의 영향을 받아서 세련미가 돋보인다.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30042_1389.jpg
5cfb82d460e9799f1bc9eae89a7f9311_1722830051_9717.JPG
 

독특한 특색을 갖춘

김해오광대

1890년경 당시 김해군 일원에서 전승되어 오던 남부형 민속가면극이다. 김해오광대는 다른 지역 오광대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쇠퇴하여 1937년을 마지막으로 이상 연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연행 당시의 탈을 수합하고 대사를 채록했으며, 당시 생존 연희자로부터 연행을 직접 전승할 있었다. 이는 다른 지역 탈춤 전승 과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김해오광대의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김해오광대는 오광대놀이에 비해 특징적으로 노름꾼과장이 있으며, 중과장에서는 노장과 상좌 사이에 남색(男色) , 동성애의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대부분의 탈춤이 승려가 속세에 내려와 여자들과 놀아나는 것을 주제로 하지만 김해오광대에서는 노장이 자신의 제자인 상좌를 유혹하는 것으로, 당시 성행했던 남색을 보여주는 탈춤으로 유일하다. 또한 김해오광대 탈은 전부 박으로 만들었으며, 사자와 담비 탈은 대소쿠리로 만든 것이 특색이다. 대부분 가면을 쓰고 나오는데 상두꾼, 봉사, 의원, 무당은 가면을 쓰지 않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