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취향의 발견] 지역의 문화를 담은 걸~쭉한 한 사발, 경남 전통 막걸리
페이지 정보
vol. 69 / 25-04-23 김보배본문
술 한 잔에는 땅의 정수, 사람들의 손길, 그리고 세대를 아우르는 전통이 깃들어 있다. 지역 전통 막걸리는 그저 술이 아닌 오랜 세월 내려온 맛의 기억이자, 지역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중요한 상징이다. 경남에는 지역의 자연과 문화, 지역민들의 삶의 방식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통 막걸리들이 있다. 이런 전통주들은 지역 문화예술의 일부로 공동체의 유대를 다지고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 글에서는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경남의 전통 막걸리들을 소개하고, 이런 전통주들이 지역민들의 삶과 얽혀 어떻게 그 맛과 가치를 지켜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통을 잇는 고성의 맛과 문화, 고성막걸리
시작은 1968년, 경남 고성의 작은 양조장이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항아리에 숙성시키는 전통 방식을 고집했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항아리를 사용해 술을 빚고 있다. 오랜 세월 이어온 정성과 노하우의 산물, 공룡나라 고성막걸리의 얘기다. 고성막걸리는 고성의 깨끗한 물과 쌀로 정성껏 빚어 세 번의 발효를 거친다. 대량생산에 적합한 단양주에 비해 세 번 덧술해야 하는 삼양주로, 숙성 기간이 길고 과정이 번거롭다. 하지만 이런 정성이 통한 걸까. 인위적인 단맛이 아닌 곡물의 은근한 단맛과 구수함으로 이미 지역에서는 입소문이 났다. 지금은 당당히 고성군 판매 1등 막걸리로 그 맛을 인정받고 있다.
전통주로 지역을 지킨다는 자부심
고성양조장은 최근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젊은 층의 입맛을 잡기 위해 막걸리 개발부터 참신한 네이밍, 다양한 도수의 신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인 막걸리 카페를 열어 ‘막걸리=아재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도 깼다. 오가며 무료 시음도 하고, 농번기 이른 아침 농부들의 새참거리도 돼주면서 꽤 자리를 잡았다. 고성양조장의 최종 목표는 전통주를 지역의 관광 체험 아이템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술 만드는 체험을 하면서 술맛을 안 볼 수 없고, 술을 마셨으면 운전할 수 없으니 고성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관광 상품 개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성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는 ‘스치는 관광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결국 전통주를 지키는 것이 지역을 지키는 일이 되는 것. 익을수록 향긋해지는 막걸리처럼 58년 된 오랜 양조장은 오늘도 고성 전통의 맛과 멋, 역사를 지켜간다는 자부심으로 술을 빚고 있다.
자연과 전통이 어우러진 맛의 향연, 하동 악양막걸리
하동군 악양면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지역이다. 생각해 보니 <토지>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술상 그리고 막걸리다. 등장인물들은 술상을 마주하고 갈등하고, 또 막걸리를 한 잔씩 털어내며 화해한다. 그야말로 희로애락이 ‘술’에 녹아있는 셈이다. 이곳에 증조부 때부터 3대째 전통술을 빚어온 양조장 ‘악양주조’가 있다. 악양주조에서 만드는 악양막걸리는 하동의 자연을 그대로 담은 특산주이다. 하동 형제봉 기슭의 약수와 풍부한 미네랄과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는 악양면의 쌀, 이것이 바로 악양막걸리의 핵심 재료다. 원재료의 제한이 크게 없는 일반주와 달리 특산주는 근처에서 생산된 재료를 써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전통주의 맥을 지키고 싶었던 주인장의 결정이었다. 이 덕분에 단맛은 강하지 않지만 부드러운 풍미로 지역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하동의 대표 막걸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백 년 도가, 4대째 익어가는 술과 전통
악양막걸리는 어느덧 4대째 그 맥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긴 세월 이어온 전통은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술에 담아낸다. 농업 사회에서 한 잔의 막걸리는 고된 삶의 시름을 달래주는 잠깐의 휴식이자, 마을 축제나 중요한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단비 같은 존재가 돼 주었다. 단순히 한 잔의 술을 넘어, 하동의 문화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지역의 자부심이자 대를 이어가는 소중한 문화유산인 셈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우리 전통주의 가치를 소중하게, 때로는 고집스럽고 우직하게! 악양막걸리는 그렇게 지역 막걸리의 명맥을 지켜가고 있다.
100년 전통, 자연의 맛을 지키다! 양산 천성산생막걸리
양산 천성산 자락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을 지켜온 전통주가 있다. 인공감미료나 화학 성분을 사용하지 않고 청정 자연에서 전통 방식 그대로 빚어내는 천성산생막걸리. 자연 발효에만 9일이 소요되는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전통의 맛을 지키고 소비자의 건강을 위해 이러한 제조법을 고수한단다. 덕분에 자체 발효 탄산이 생겨 인공적으로 첨가물을 넣을 필요도, 변질될 우려도 없다. 지역 막걸리인 만큼 많이 팔기보다는 좋은 재료와 좋은 물로 만드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대표의 경영 철학이 드러나는 부분. 이런 노력 덕분인지 천성산생막걸리는 유산균과 발효 탄산이 풍부하여 특유의 깔끔하고 건강한 맛을 자랑하는데, 숙취가 없어 마신 후 두통 없이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술로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고 한다.
세계로 뻗어가는 양산의 막걸리
천성산생막걸리는 지역의 대표 술로서 양산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천성산양조장이 전통주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추면서 천성산생막걸리에 울금을 함유한 상품이 홍콩과 마카오 등으로 수출되며 해외 진출의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그야말로 양산과 경남을 넘어 세계적으로 지역 막걸리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것. 앞으로 천성산생막걸리는 또 어떤 행보를 이어가게 될까. 강산이 열 번도 넘게 변하는 시간 동안 지켜온 전통과 자연의 맛! 그리고 양산의 전통주를 세계에 알리며 더욱 성장해 갈 양산 천성산생막걸리의 다가올 100년에 넘치는 기대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