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경남로케이션] 꽃빛으로 채색된 필름, 경남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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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8 / 25-03-28 글 정성욱 사진 거제시 창녕군 산청군본문
경상남도의 사계절은 저마다의 빛깔로 아름답지만, 봄은 특히 매혹적이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들녘과 산자락마다 꽃들이 만개하고, 그 사이로 이야기가 스며든다. 영화와 드라마 속 배경이 되어 스크린을 수놓았던 거제 공곶이, 창녕 남지 유채밭, 산청 남사예담촌 이 세 곳의 봄 풍경과 촬영지를 따라가 보자.
거제 공곶이, 자연과 사람이 빚어낸 풍경
거제도의 숨은 보석, 공곶이. 이름에서부터 바다로 뻗어나간 곶(串)과 둥그스름한 지형을 뜻하는 고(尻)가 어우러져 ‘엉덩이처럼 튀어나온 땅’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1969년부터 한 부부가 정성을 들여 가꾼 이곳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 독특한 정원으로 변모했다. 공곶이는 영화 ‘종려나무 숲’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랑과 운명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바닷가를 따라 걸으며 지난날을 떠올리던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고즈넉한 풍광이 영화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준 셈이다. 봄이 오면 공곶이는 또 다른 색채로 물든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노란 물결을 이루고, 동백터널에서는 붉은 꽃잎이 흩날린다. 특히 2024년 시작된 공곶이수선화축제가 3월마다 열리며, 공연과 체험 부스, 프리마켓이 함께 진행돼 방문객들에게 더욱 다채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곳의 백미는 단연 동백터널이다. 수십 년간 자란 동백나무들이 서로 맞닿아 만든 아치형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한 장면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3~4월이면 바닥을 붉게 수놓은 동백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공곶이는 단순한 촬영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예술 작품과도 같은 곳이다.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지닌 이곳은 봄에는 유채꽃과 동백이, 여름에는 푸른 녹음이, 가을에는 억새가, 겨울에는 다시 붉은 동백이 장관을 이루며 사계절 내내 여행자들의 발길을 이끈다.
창녕 남지 유채밭, 노란 물결 속으로
창녕 남지 유채밭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유채꽃 단지다. 매년 봄이면 이곳에서는 창녕낙동강유채축제가 열리며, 2025년에는 4월 10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노란 유채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 축제의 장은 더욱 화려해진다. 4월이 되면 40만㎡에 이르는 광활한 들판이 온통 유채꽃으로 물들고,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남지철교, 바위 절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원두막과 조형물들이 곳곳에 자리 잡아 방문객을 반기며, 낙동강 둔치를 활용한 생태레포츠단지가 조성되어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남지 유채밭의 시작은 다소 특별하다. 과거 이곳은 제방이 없어 홍수 피해가 반복되던 지역이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극심한 수해를 입은 후, 대규모 복구사업이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제방이 새롭게 조성되며 넓은 제외지가 형성되었다. 이후 남은 공간에 유채꽃을 심기 시작했고, 그 작은 씨앗이 전국 최대의 유채밭으로 성장했다.
남지철교는 이 유채밭과 함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래된 철교와 노란 유채꽃이 어우러진 장면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며, 이곳에서 촬영된 드라마 ‘영웅시대’의 장면들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축제 기간에는 다양한 문화 공연과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 전통놀이 체험, 유채꽃 향기 주머니 만들기 등이 준비되어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봄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산청 남사예담촌, 매화 향기 머무는 한옥 마을
산청의 남사예담촌은 전통 한옥 마을로,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여러 드라마의 촬영지로 선택된 곳이다. 봄이 되면 마을 곳곳에서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은은한 향이 골목마다 스며들어 한층 더 운치 있는 풍경을 자아낸다.이곳의 한옥마다 오랜 세월을 지켜온 매화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오매불망(五梅不忘)’이라 불리는 다섯 문중의 매화나무는 각 가문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나무들로, 선비 정신과 전통을 품고 있다. 이 매화나무들은 단순한 경관 요소가 아니라, 오랜 시간 가문의 명맥을 이어온 상징이자,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존재다. 남사예담촌은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조선 시대 왕실과 관련된 장면을 담아낸 ‘원경’, 주요 궁궐 외경 장면을 촬영한 ‘왕이 된 남자’, 그리고 현대적 감성을 녹여낸 ‘이번 생도 잘 부탁해’ 등 다채로운 작품 속에서 이곳의 한옥과 정취가 빛을 발했다. 한옥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은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극의 분위기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남사예담촌이 단순한 촬영지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 양반 가옥이 그대로 보존된 이곳은 과거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 공간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기와지붕, 대청마루에 스며든 세월의 결, 정원에 피어난 매화 한 송이까지—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드라마 속 장면을 떠올리며 마을을 거닐다 보면, 어느 순간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봄날의 매화 향기 속에서, 한옥이 간직한 이야기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 남사예담촌은 그렇게,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오래도록 머물게 만드는 마을이다. 경남의 봄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를 따라 여행하며 그 속에 스며든 이야기를 되새겨보는 일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거제 공곶이의 노란 유채꽃과 신비로운 동백터널, 창녕 남지 유채밭의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들판, 산청 남사예담촌의 고즈넉한 한옥과 매화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계절과 시간이 만들어낸 특별한 순간을 담아낸다. 이번 봄, 경남의 이곳들을 찾아 꽃이 피어나는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속에 깃든 이야기와 풍경에 흠뻑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자연과 시간이 함께 빚어낸 이 봄의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