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크, 클라운’,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를 위한 공연
제3기 경남문화기자단 윤종승
팬터마임 아동극이면서 성인극
말이 있기 전에 먼저 몸이 있었다. 태초의 인류에게 몸짓은 언어 그 자체였다. 불필요한 수식을 걷어낸 온전한 몸짓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정을 공유했다. 몸짓이 아닌 문자로 형식화한 언어의 탄생과 진화는 인간사회가 소유와 권력의 위계로 계층화되어 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 했다. 현대사회는 현란한 수식과 고도로 체계화한 언어의 사회이다. 태초의 언어인 몸짓은 별다른 장치 없이 감정의 직접적인 메시지를 표현했다. 하지만 현대의 언어는 온갖 은유와 수수께끼 같은 해석의 장막을 젖혀야 비로소 온전한 메시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 과정은 지난하고 때로는 매우 피곤하다.
정크, 클라운 공연의 소품을 활용한 다양한 연출장면들
정크, 클라운 공식 포스터
그렇기 때문에 대사 없이 배우의 표정과 몸짓만으로 연기하는 팬터마임(Pantomime)은 다양한 세대와 계층, 인종을 아우르는 관객에게 극의 정서와 메시지를 가장 순수하고 평등하게 전달할 수 있다. 팬터마임 아동극이자 아직도 마음 한편에 동심을 간직하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성인극이기도 한 ‘정크, 클라운’ 공연을 다녀왔다.
가족이 함께 즐기는 공연
지난 3월 15일(목)부터 18일(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사)극단현장이 제작한 ‘정크, 클라운’ 공연이 있었다. 봄의 문턱에 선 대학로는 공연을 찾은 연인과 가족 단위 시민들로 들떠 있었다. 얼마간 익숙하지 않은 길을 헤매다 공연장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공연장에는 오랜만의 봄나들이인양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고사리 같은 아이들 손을 잡은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아이들은 공연시작 전부터 개구지게 장난을 치거나 공연장 로비가 떠나갈 듯 큰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 날 관람객 중에서 아이들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어른들만큼이나 혹은 어른들보다도 더 빡빡한 일상에 지쳐 있을 아이들의 순수하고 제약 없는 행동과 웃음소리가 반가운 듯 아이들의 자유분방한 태도를 수용했다.
공연시작 시간이 임박하고 공연좌석에 자리를 잡아서도 얼마간 로비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이윽고 공연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그제야 객석 분위기는 한결 차분함을 찾았다. 하지만 객석의 평온함은 얼마가지 못했다. 광대들이 등장하자 아이들이 먼저 키득키득 참지 못한 웃음을 터트렸다. 광대들은 등장만으로도 충분히 우스꽝스러웠다.
무대와 관객이 한 데 어우러지다
광대들은 동네 어귀 어딘가에서 구르고 뛰어놀다 헤지고 뜯어졌을 꾀죄죄한 차림새와 익살스러운 동작으로 등장했다. 광대들의 모양과 차림새가 아파트 뒷산에서 전쟁놀이 하며 동무들과 어울리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뭇가지 꺾어 총 만들고 물바가지 뒤집어쓰고는 줄 맞추어 병정놀이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광대들은 주변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소품들 원래의 쓰임새에 구애 받지 않았다. 본래의 역할을 다하고 쓸모가 없어진 물건들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광대들은 녹슨 자전거핸들, 깨진 바가지, 찌그러진 냄비, 버려진 선풍기 날개를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새롭게 재활용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은 일상의 모든 것을 재발견하고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외할머니가 참기름, 들기름 보내주려 싸주시던 빨간 보자기를 슈퍼맨 망토로 재해석하였고, 친할머니 빨래하시고 부엌 가마에 물 부으실 때 쓰시던 바가지를 병정헬멧으로 또 운전대로 삼아 놀았다.
공연을 보던 아이들은 광대들의 행동 하나 하나에 까르르 웃었다. 요즘은 듣기 힘든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웃음소리가 전염하듯 이어졌다. 아이들은 소품을 이용한 광대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흥미롭게 관람하며 나름대로의 상상을 더했다. “어? 코끼리다! 코끼리~까르륵”, “엄마 저 아저씨, 물고기 흉내 내는 것 같아!”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공연은 광대들의 놀이에 아이들의 순수한 상상력이 어우러져 더욱 풍성해졌다. 이번 공연은 팬터마임으로 대사는 없었지만 오히려 배우와 관객 간의 소통은 더욱 활발했고 공연장과 객석은 허물없이 한데로 어우러졌다.
(사)극단현장 사무국장이자 배우 최동석 씨가 정크, 클라운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상의 틀에 갇힌 어른에게 주는 위안
공연을 관람하는 어른들의 태도 또한 인상적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조금은 격앙된 반응에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또 어쩌면 약간은 유치할 수도 있는 공연내용에 위화감 없이 몰입하고 있었다. 공연 초반에는 어정쩡한 표정을 짓던 어른들도 공연이 진행될수록 티 없이 자연스런 미소를 지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공연이 종반에 다다를수록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사라졌다. 광대들과 아이, 어른 관람객 모두가 동심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고 정서를 교감했다.
‘정크, 클라운’은 우리를 아직은 세상의 정형화된 질서와 쓰임새를 배우지 못했을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딱딱하고 틀에 박힌 일상에 지쳐 있는 어른들에게 더욱 위안과 안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니인터뷰- 극단 현장 배우 최동석
- 최동석 인터뷰
- 사)극단현장 사무국장 겸 ‘정크, 클라운’ 배우
- (사)극단현장이 ‘2017 지역협력형사업 우수사례 워크숍’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 상주단체 사업지역인 함양에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프로그램을 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함양지역에 맞는 프로그램을 발굴하려 고민을 많이 했다. 작년에는 최치원 선생이 홍수를 막기 위해 함양 상림 숲을 조성한 창작이야기가 호평을 받았다. 또 함양예술소를 만들어서 아동극, 1인극 등 지역주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많이 발굴한 것도 주효했다고 본다.
- 함양문화예술회관 상주단체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함양은 경남연극제를 개최한 경험도 있고 문화예술관련 시스템이 타 지역에 비해 잘 갖추어져 있다. 함양문화예술회관도 군(郡)치고는 활성화되어 있고 인구나 인프라도 괜찮다. 또 (문화예술관련) 직원분의 마인드나 전문성이 갖추어져 있다. 함양이 땅의 기운이 좋은 것 같다(웃음). 먹거리도 풍요롭고 관객분도 따뜻하다. 요새는 마니아층도 늘었다.
- 경남에 기반을 둔 극단으로서 애로사항은 없는가. 그럼에도 경남에서 극단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서부경남에 극단을 두고 있지만 우리가 움직이는 공간은 전국으로 생각해 순회공연도 많이 한다. 그렇지만 예산이 많지 않기 때문에 홍보가 힘들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광고, 하다못해 포스터만 하더라도 예산이 부족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있다. 저희 공연장도 있는 홈그라운드에서 탄탄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공유할 수 있다. 지역팀이란 편견은 이제 가질 필요가 없다. (아마 극단이 서울에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학로 극장에서 장기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
- 경남문화예술진흥원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 예전처럼 관리·감독한다는 인상은 사라졌다. 단지 수직적인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 배경에 사려 깊은 고민이 느껴진다. 진흥원 직원분들도 진심으로 따뜻하게 마음을 쏟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진흥원과 진정한 원 팀이 이루어진 것 같다. 앞으로 지원사업들이 많아져서 문화예술 공연 팀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연극 작업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