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_예술공연아카데미
경남일보
관객의 심장을 녹이는 뮤지컬의 마법사
‘더 플레이’ 박진용 예술감독의 진주빛 브로드웨이
일제의 억압에 빼앗긴 이 땅은 멈추어 있으면 역사에 사라져
당신의 여생을 저들의 손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며 살 것입니까.
뮤지컬 <의기>, ‘독립의 그날을 향해’ 중
진주기생 산홍과 논개. 역사 앞에 당당히 투쟁한 이들의 항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직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풀지 못한 역사 속에 진주의 지역색을 진하게 더해 엮어낸 작품 하나가 있다. 창작 뮤지컬 <의기>다. 의기는 뮤지컬 기반이라고는 하나 없던 지역에서 홀로 뮤지컬 사랑을 키워 온 박진용 감독의 네 번째 창작 뮤지컬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벌였다는 진주기생들의 독립 만세운동과 산홍이 만나 뮤지컬 <의기>가 탄생했다.
뮤지컬 <의기>는 2018년 11월 8일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갈라 콘서트를 열었다. 본 공연을 앞두고 관객 반응을 엿볼 기회였다. <의기>의 갈라 콘서트에는 1천여 명의 관객이 모이면서 흥행을 예고했다. 2019년 3월 8일과 9일에 걸쳐 열린 본 공연은 배우 20명, 밴드 연주자 8명, 국악연주자 3명, 제작 및 스태프 20명까지 총 50명 이상이 참여했고, 105분 동안 25개의 곡이 공연됐다. 이틀간 관객은 2천여 명에 달했다. ‘더 플레이’ 소속 배우들 외에도 오디션으로 뽑은 시민배우들이 함께 했다. 뮤지컬 불모지 진주에서 대작 ‘의기’를 탄생시킨 뮤지컬 제작자 박진용 감독. 그의 뮤지컬 히스토리는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감독은 창신대학교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밴드 ‘블루라라’에서 리더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지역에서 음악 활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학원과 강사 활동을 주업으로 삼으며 음악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박 감독이 처음 뮤지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13년이다. 뮤지컬 기반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지역에서 허허벌판에 씨앗이라도 뿌리듯, 망망대해에 낚싯줄 하나 던지듯 처음 내놓은 창작 뮤지컬 <지난겨울 이야기>는 박 감독의 오늘을 있게 한 든든한 마중물이 됐다.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이 작품은 2014년, 경상대학교 국제어학원 대공연장에서 첫 무대를 선보였다. 당시 진주지역은 뮤지컬 배우도, 연주팀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어쩌자고 진주에서 뮤지컬을 시작하게 됐냐는 질문에 박 감독은 수도권은 이미 뮤지컬 인구가 넘쳐난다며 백지상태의 지역에서 도전하자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시장이 좁은 이곳이 오히려 활동을 펼쳐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죠. 좋아하는 말 중에 ‘영웅은 난세에 탄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기반이 없는 바로 여기, 지역이 뮤지컬의 난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가 오히려 기회의 땅이라는 마음으로 도전하게 됐죠"
지역에서 뮤지컬 전문 단체를 만들게 된 계기다. ‘더 플레이’는 2014년 <지난겨울 이야기>와 함께 탄생해 공연 전문단체로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다. ‘더 플레이’ 창립 후 대표를 맡아 운영 전반에 앞장서 온 박 감독은 2018년부터 대표직을 내려놓고 예술 감독으로 작품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더 플레이’는 3대 유대편 대표가 운영을 맡고 있다. 처음 써본 뮤지컬 작품이지만 <지난겨울 이야기>는 자작곡만 24곡이 들어간 1시간 50분짜리 장편이다. 뮤지컬 경력이 전무한 노래하는 친구들을 불러다 연기를 가르치고 라이브 연주팀을 섭외해 반주를 맡겼다. 그때 박 감독과 작품을 올렸던 배우 중에는 지금도 ‘더 플레이’에서 함께 활동하는 배우들이 있다.
첫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난관도 많았다. 2012년 결혼해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던 상황. 박 감독은 “딱 이 작품만 해보고 안 되면 문화예술활동을 접고 목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작품에 몰두했다. 목수라니, 뜬금없지만 20대 초반 아르바이트로 나섰던 인테리어 일이 손에 곧잘 맞았다고 했다. 임신으로 힘들었을 아내는 오히려 박 감독을 응원하는 쪽이었다. 학원으로 벌어들인 사비를 털어가며 작품 준비를 하던 터라 “해보자”라고 응원해준 아내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아내 박민지 씨(33)는 지금도 ‘더 플레이’에서 조연출과 단역출연까지 든든한 동반자로 활약하고 있다.
막상 공연을 한 달 앞두고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지 말지를 두고 단원들이 투표까지 벌였다. 생판 뮤지컬을 모르던 사람들을 끌고 왔으나 과연 무대에 올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온 시간이었다. “이래서 되겠나…”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사람도 있었다. 투표 결과는 “GO.”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오른 <지난겨울 이야기>는 성공적이었다. 첫 작품의 성공은 박 감독의 진로에 확신을 더해줬다.
박 감독은 <레이니 맨>과 <의기>를 대표작으로 꼽았다. 수도권으로 원정관람으로 눈 높은 관객들에게도 칭송이 자자한 작품이다. “지역에서 어떻게 이런 좋은 작품이 나왔느냐”며 “수도권 뮤지컬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는 평도 이어진다. 70석짜리 ‘더 플레이’의 공연공간인 소극장 ‘날개’에서는 지난해 <레이니 맨>을 1주일간 연속 공연하기도 했다. 인근 도시에서도 팬들이 찾아온다. 반응이 좋아 앙코르 공연까지 했다.
대형무대가 필요한 <의기>는 2019년 11월 함양문화예술회관을 마지막으로 아직 다음 공연을 기약하지 못하고 있다. ‘더 플레이’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바로 공연예산인 탓이다. 뮤지컬 공연은 제작비가 많이 든다. 대형무대를 세우지 않아도, 연주팀과 의상, 소품 등 지출할 데가 많다. 지역에서 뮤지컬 투자자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그나마 ‘의기’는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과 함께 기획해 작품을 진행하는데 절대적인 큰 힘이 되었다.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면 준비기간이 1~2년은 걸리지만 아직은 열정 페이가 절실한 현장이다. 그래도 계속 도전하게 되는 그 동력을 물었다.
이제 시작이니까, 공연을 계속하면서 작품 레퍼토리가 쌓아가는 거죠. 한번 무대에 올리는 것은 힘들지만, 한번 올리면 그것이 레퍼토리로 남는 거죠. 아직은 작은 역사를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문화예술 공연 마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더 플레이’도 당장 계획된 공연 스케줄이 물음표로 남았다. 박 감독은 올해 두 개의 작품을 진행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나는 예술여행 사업이 선정되어 20회차 공연 준비 중인 <잔칫날>과 하반기에 개막을 준비 중인 <소나기>다. 뮤지컬을 쓰고 무대에 올리고, 기획과 연출로 바쁜 이 지역의 청년예술인을 부르는 곳도 많다. 문화도시를 추진 중에 있는 진주시의 청년문화 활동가로 참여하고 있고 경남청년문화창업협동조합에서 대표로 활동 중이다. 또한 한국국제대학교 뮤지컬 전공 교수로 후배를 키워내는데도 열정을 쏟고 있다.
박 감독의 다음 목표는 뮤지컬 영화다. 당장 올해 제작되는 영화작업에 동참한다. 무대에서 영상으로 채널의 변화를 꾀하는 셈이다. ‘더 플레이’ 역시 유튜브 채널 ‘직스티비’를 열고 공연 모습과 뮤지컬 가수들이 참가한 리메이크 커버곡 등을 소개하고 있다. <레이니 맨>에 나오는 곡 중 하나인 ‘난 마법에 빠진 레이니맨’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난 마법에 빠진 레이니 맨, 지독한 마법에 걸렸죠” 어쩌면 뮤지컬이란 마법에 빠져버린 박진용 감독. 빠져 들수록 커지는 뮤지컬을 향한 그의 꿈을 물었다.
<레미제라블>, <라라랜드> 같은 대작 뮤지컬 영화를 만드는 것이 10년 후쯤의 희망 사항이라면 지금 당장은 단편 뮤지컬 영화를 준비하는 것이 꿈입니다.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공연에 비해 뮤지컬 영화는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죠. 뮤지컬 영화로 관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을 이 무대 앞 객석에서 만날 수도 있게 될 겁니다.
결국 뮤지컬로 돌아오기 위해 영화라는 채널을 빌리고 싶다는 이야기다. 여전히 만만치 않은 지역의 뮤지컬 현장이지만 도전과 기회가 남아 있는 한 박 감독과 ‘더 플레이’의 롱런은 당분간 마침표를 만날 일이 없다.
더 플레이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 257 (2층 소극장 ‘날개’, 3층 더 플레이 아카데미)